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집트 신왕국 (문단 편집) === 제18왕조 === 한때 번영하던 [[이집트 중왕국]]은 힉소스인들의 침략으로 멸망했고, [[힉소스]]인들이 나일 하류의 하이집트를 차지하고 제15왕조를 세우면서 [[이집트 제2중간기|제2중간기]]가 열렸다. 그러나 결국 이집트 원주민들이 세운 제17왕조의 왕통을 이은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인들을 몰아내고 이집트 신왕국을 세우면서 제2중간기의 혼란을 잠재웠다. 신왕국의 첫 왕조인 제18왕조의 초대 파라오 아흐모세 1세는 약 25년 4개월 동안 재위하며 힉소스인들이 휩쓸고 간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흐모세 1세는 힉소스를 깨부순 다음 시시건건 남쪽에서 이집트를 괴롭히던 누비아인들마저 물리치며 국경을 안정시켰다. 외치가 안정되자 오랜 기간 동안 관심 밖에 있었던 예술과 문화에도 관심을 돌렸다. 하이집트 일대의 대신전들을 복구함과 동시에 제2중간기 이전에 삽을 떴으나 전쟁 때문에 중지된 사업들 역시 재개했다. 태양신 [[아문]]에게 바치는 신전, 지식의 신 [[프타]]에게 바치는 신전들을 지어 전통적인 신들의 권위를 높였고 [[룩소르|테베]]를 수도로 삼아 전국을 평정하는 등 신왕국이 번영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놓는 업적을 남겼다. 기원전 1524년에 아흐모세 1세가 사망하자 아들 아멘호테프 1세가 새로운 파라오가 되었다. [[아멘호테프 1세]]의 20여 년에 걸친 재위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으나 확실한 것은 아멘호테프 1세 시대에도 아흐모세 1세가 시작한 복구 사업은 계속되었다는 것. 아멘호테프 1세는 누비아, 레반트 일대에 대한 이집트의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한편 강력한 군대를 이끌며 군사적으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문학적으로도 상당한 성취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이집트의 사후세계를 위한 지침서에 해당하는 '사자(死者)의 서'가 이때 최종적으로 정리되어 완성되었고 이집트의 전통 의학서인 에베르스 파피루스가 등장하는 등 수많은 서책들이 발간되었다. 심지어는 세계 최초의 [[물시계]]가 이때 처음 등장하였다는 말도 있을 정도.[* 당시 이집트의 시간구분은 정확하지 않았다. 보통 밤의 길이를 12분의 1로 나누어 시간을 쟀는데, 때문에 밤낮의 길이가 달라짐에 따라 시간을 구분하는 기준도 늘어났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했다. 그래서 물시계를 쓸 때에 밤의 길이에 맞추어 물의 양을 조절했다고 한다.] 아멘호테프 1세는 카르나크에 위치한 [[카르나크 신전|대신전]]을 복구할 것을 명하며 양 옆에 높이가 20큐빗(약 10.5 m)에 달하는 거대한 탑문과 [[오벨리스크]]들을 세웠고, 전란 통에 파괴된 신전들을 복원하면서 제18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아멘호테프 1세는 기원전 1504년에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투트모세 1세]]가 즉위했다. 투트모세 1세는 13년 정도 재위하며 [[누비아]]에서 일어난 반란들을 수 차례 진압했고, 카르나크 대신전을 대대적으로 개축,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대한 신전으로 변모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투트모세 1세는 처음으로 [[왕가의 계곡]]에 안장된 파라오이기도 했다.] ||[[파일:external/images.metmuseum.org/Hatshepsut2012.jpg|height=300]]||[[파일:TuthmosisIII-2.png|height=300]]||[[파일:Colossal_Amenhotep_III_British_Museum.jpg|height=300]]|| || [[하트셉수트]] 여왕[* 타 파라오들의 석상보다 약간 더 여성적인 모습인 것을 볼 수 있다.] || [[투트모세 3세]] || [[아멘호테프 3세]] || 투트모세 1세 사후 왕위에 오른 [[투트모세 2세]]에 대해서는 약 13년 정도 재위한 것을 제외하면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나마 알려진 것이라면 왕이 교체될 때마다 이벤트처럼 일어나던 누비아인들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는 것 정도가 있다. 투트모세 2세가 유명을 달리하자 그의 아내이자 투트모세 1세의 딸이었던[* 고대 이집트 왕가에서는 왕실의 신성을 보존한다는 이유로 [[근친혼]]이 유행했다.] [[하트셉수트]]가 여왕으로 즉위했다.[* 보통 하트셉수트를 이집트의 첫 여왕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이 아니다. 이집트의 첫 확인된 여왕은 중왕국 시절 제12왕조의 [[소베크네페루]]였다.] 하트셉수트는 처음에는 정통 후계자 [[투트모세 3세]]의 섭정 자격으로 왕권을 거머쥐었으나 나중에는 살아있는 유일한 투트모세 1세의 자손이라는 정통성을 내세워 공동 파라오에 즉위하며 완벽히 왕위를 장악했다. 하트셉수트는 여성이라는 선천적인 정치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정치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21년이라는 상당히 긴 재위 기간 동안 하트셉수트는 제2중간기 시절 끊어졌던 교역로들을 복구하고 [[아프리카의 뿔]] 일대, 푼트와 교류하는 등 여러 업적을 남겼다. 또한 현대까지도 유명한 유적들 중 하나인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등을 포함해 수 백개가 넘는 건물들을 지어댔는데, 하트셉수트 시대에 지어진 건물들이 유난히 아름다웠기에 후대의 파라오들이 일부러 건물에 새겨진 이름만 지우고 마치 자신이 지은 것처럼 조작하려 시도할 정도였다.[* 하트셉수트는 가짜 수염 등을 포함해 남성 파라오와 완전히 똑같은 차림을 한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지위가 높았기에 가능했던 일. 그녀는 자신을 벽화에 남성으로 새기게 하거나 '마아트카레'라고 파라오식 이름을 따로 짓는 등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많은 수단을 활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섭정 및 공동 파라오로 활약하던 하트셉수트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 때문에 21년 동안 빛을 못보고 있던 [[투트모세 3세]]가 본격적인 통치를 펼치기 시작한다. 투트모세 3세는 '정복자'라는 칭호가 붙을 정도로 활발한 정벌 활동을 나선 정복군주였다고 알려져 있다. 투트모세 3세는 54년에 걸친 재위 기간 동안 재위했는데, 한창 혈기왕성할 때에는 20년 동안 16번이나 전쟁을 치렀다고 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전쟁을 많이 벌였는지 알 수 있다. 투트모세 3세는 팔레스타인 일대로 진출하여 1차 원정에서 메기도를 포함한 도시 성읍들을 정복하는 전과를 올렸다. 특히 메기도를 함락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메기도 공성전은 8개월 동안 이어졌다. 투트모세 3세는 일생 동안 정복전쟁을 총 17번 하였는데, 그중 최대 규모일 정도로 굉장히 잔혹한 싸움이었다고 전한다. 5차, 6차, 7차 원정에서는 카데시를 중심으로 한 [[시리아]] 일대를 쓸어버리고 수많은 왕국들을 복속시켰다. 시리아를 정복한 이후에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당대 최강국들 중 하나였던 [[미탄니]]를 쳤다. 먼 이집트의 파라오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침략할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한 미탄니는 당연히 투트모세 3세에 대한 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고, 덕분에 투트모세 3세는 유유히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부유한 도시들을 약탈하며 막대한 전리품들을 쓸어담을 수 있었다.[* 이 당시 이집트 인들은 나일 강만 보고 살았기에, 나일 강과 반대로 흐르는 메소포타미아 강을 신기하게 여겼다. 그 때문에 투트모세의 칭호 중에는 '역류를 건넌 자' 라는 호칭이 있다.] 투트모세 3세는 이후에도 꾸준하게 소아시아, 레반트 일대를 약탈하며 소소하게 전쟁을 계속했고, 그러던 중 기원전 1425년에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투트모세 3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멘호테프 2세]]의 시대는 미탄니와의 적대적인 공존으로 특징지어진다. 아멘호테프 2세는 기원전 1427년부터 기원전 1401년까지 대략 26년 정도 이집트를 통치했다. 아멘호테프 2세는 아버지처럼 군대를 이끌고 곳곳을 누비고 다녔고, 총 3차에 걸친 원정을 떠났다. 재위 3년차부터 정복 활동을 시작했는데, [[시리아]]의 오론토스 강 일대에서 미탄니 군대를 물리치고 카데시에서 시리아 장군 7명을 단신으로 처리하는 등 성공적으로 1차 원정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원정을 승리로 이끈 아멘호테프 2세는 전투 도중 죽인 시리아 장군 7명의 시체를 배의 앞머리에 매단 채로 그대로 나일 강을 따라 [[룩소르|테베]]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당연히 이집트인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파라오를 열렬히 환영했고, 이에 크게 만족한 아멘호테프 2세는 세를 몰아 [[누비아]] 일대까지 군사를 몰아 또다시 공적을 세웠다. 재위 7년 차에 시리아의 봉신 도시들이 미탄니의 사주를 받아 반란을 일으키자 2차 원정을 떠났다. 2차 원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이 없다. 이집트 측의 기록에서는 승리했다고 적혀있으나, 특기할만한 사항이 없는 걸로 보아 별다른 공적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온 것일 가능성이 크다. 재위 9년 차에 벌어진 제3차 원정에서 아멘호테프 2세는 [[갈릴리 호수]] 이남까지 진출하여 10만 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잡아왔다고 전한다. 아멘호테프 2세가 사망하자 아들 [[투트모세 4세]]가 새 파라오가 되었다. 투트모세 4세는 상대적으로 제18왕조의 파라오들에 비하여 알려진 바가 적지만, 특기할 만한 점으로는 모래에 파묻혀 있던 [[기자의 대스핑크스]]를 다시 복구한 것이 있다. 한 왕자가 밖에서 잠을 자던 중, 왕자 바로 아래의 모래 속에 묻혀 있던 스핑크스가 만약 자신을 꺼내준다면 왕위를 주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왕자는 이를 받아들였고, 그가 바로 투트모세 4세라는 이야기이다. 고고학자들은 이 설화를 통해 투트모세 4세가 원래부터 정통성이 있던 왕위계승자가 아니라 얼떨결에 파라오에 올랐다는 가설에 힘을 싣고 있다. 투트모세 4세는 대략 10년 정도 타 파라오들에 비하여 짧은 기간 동안 재위했다. 투트모세 4세가 즉위 10년 만에 사망하자 아들 [[아멘호테프 3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아멘호테프 3세의 재위기에 이집트 신왕국은 유례없는 문화의 발전과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아멘호테프 3세는 약 39년 정도 왕좌를 지키면서 워낙에 많은 업적을 남겼기에 이집트에서는 '아멘호테프 대제' 혹은 '아멘호테프 대왕'이라고 칭송해 부르기도 할 정도의 위대한 명군이었다. 아멘호테흐 3세는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았기에 재위 초반부에는 섭정들이 대신 국정을 맡아 처리했다. 그러나 재위 10년째부터 100마리가 넘는 사자를 죽였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로 점차 혈기왕성한 청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물론 과장된 숫자일 것이다. 아니면 철제 우리나 사육장 등 철저하게 관리된 환경에서 사자 100마리를 '샤냥'했을 가능성도 있다.] 친정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명군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아멘호테프 3세는 강력한 일신의 무력으로 칭송받았으나 전임자들과는 달리 딱히 정복 활동에 나서거나 전쟁을 대대적으로 벌이지는 않은, 비교적 평화를 추구했던 파라오였다. 대신 그는 말카타에 당대 이집트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왕궁을 신축하거나 세드 축제[* 파라오의 통치를 축복하고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축제. [[이집트 고왕국]] 시대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가 깊은 행사였다.]를 성대하게 여는 등 내치에 신경쓰며 이집트의 부를 막대한 수준으로 불려나갔다. 나일 강 유역의 수많은 장소들에 새로운 사원과 신전들이 신축되었으며, 왕실 작업장에서는 화려한 장신구와 보물들이 쏟아져나왔다. 아멘호테프 3세는 [[바빌론]]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지중해의 도시들과 교역하며 이집트 경제를 폭발적으로 성장시켰고, 덕분에 신왕국 제18왕조는 그의 재위기 내내 평화기를 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